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들에 대해
어젠 오랜만에 졸업동기들을 만났다.
다시 새로운 진로를 정해 나아가기 시작한 나와는 달리
간호사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뻔한 병원 얘기들과
앞으로의 진로들
그리고 흥미로운 연애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워갔다.
을지로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자리 잡은 와인바에서
그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피에 알코올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그 아이와의 이야기를 또 꺼내어 홀로 궁상에 젖었다.
나도 모르게 동창들을 만나면 생각나는 그 아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내 모습이 마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 같아 보여 괜히 웃음이 났다.
그리고 뒤 이어 씁쓸하고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한 명의 연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서 그에게 소리쳤다.
"좋아하는 마음은 전해야 하는 거야. 자, 따라 해 봐, 좋 아 해 요."
하지만 그에게는 내 말이 닿질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내 안에 나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나는 나에게 엄격하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내 감정을, 그리고 특히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탈무드 속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 처럼
나는 내 감정이 향하는 대상을 향해 신포도 취급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녀는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이 감정에 집중한 시간이 없어,
그저 회피하고 지레 짐작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지금까지 그 아이를 생각하면 여전히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은 왜일까..
마치 염색된 듯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아버린 감정.
그래서 밤새 이 감정을 관찰해 보며 그렇게 과거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었다.
내 2년간 신세를 졌던 자취방.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약속
그 아이가 이사를 해야 해서 잠시 이사를 돕기로 했던 약속
곧 나가야 할 시간이다.
근데 내가 어떻게 이 약속을 잡게 됐더라...
아 그래 바로 전날이 배탈이 심하게 났던 날이었지..
전날에 그녀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던 중
나의 설레는 마음과는 달리 뱃속은 뒤죽박죽으로 고장이 났던 상태였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배탈이 나서 죽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그녀 역시 죽을 먹고 싶다고 했고
그럼 죽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이사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 역시 돕겠다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음.. 맞아 그랬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집은 내 가슴까지 오는 담을 넘기만 하면 5분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사를 할 곳은 마찬가지로 50m도 안될 거리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녀와 했던 대화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날씨
그리고 그녀와 걸었던 흙길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몇 번의 눈빛 말고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압축된 파일처럼 그렇게 시간을 넘어서
그녀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시내에는 죽집이 한 곳 있었는데
그렇게 죽을 먹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 반이나 남겼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도 긴장을 한 탓인지..
죽 한 그릇에 배가 꽤 불러버렸다.
그렇게 앉아 잠시 얘기를 하다
밖을 나와 목적지도 없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걷고 있었고
그녀는 침묵을 깨기 위해서인지 가방 속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았다.
망고젤리였는데 본인이 좋아하는 젤리라며 하나를 쥐어줬는데
나는 참 바보였던 것이
그 젤리를 쥔 손을 아직도 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맛있다는 반응을 기대한 듯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처음 받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마치 놓치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담은 듯 손을 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망고젤리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녀와 우리 앞에
동기가 나타났다.
동기는 처음에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우리 둘을 흘겼고
뒤이어 그녀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정말.. 정말 허무한 감정이
그리고 태연해야만 했던 나의 모습이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물에 씻겨 나가는 솜사탕처럼
마치 수증기처럼
잡힐 듯 보이고 실제로 손에 닿았지만 눈을 한번 감은 새
사라지고
원래 없었다는 것처럼 나만 홀로 남겨지는 이 느낌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하고 잔잔했다.
나의 배는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아갔고
그녀와의 연락도 빈번해질 무렵
나의 여우 그러니까 신포도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나와 함께 실습을 하던 형이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고
나는 그녀와 설레는 마음으로 연락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형이 전화를 하러 나가는 횟수가 많아졌고
나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공교롭게도.. 나와 연락하던 그녀가 잠시 멈춘 순간
형이 전화를 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형이 들어오기 5분 전쯤부터 다시 그녀와 연락이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이
내 의심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친구와 잠시 통화를 하겠다고 연락이 멈춘 순간
나의 여우는 신포도를 발견하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었던 거구나
그렇게 나는 또다시 지구에서 튕겨져 나와 홀로 우주 속에 남겨지고 말았다.
그렇게 학교에서도 다시 연락이 와도
그녀와는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었고
그녀도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앞으로 5년 10년을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이기적 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내 오랜 마음을 전하려고 한다.
그녀와 어떻게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해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그 자리에 두고 오려고 한다.
너를 처음 본 이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좋아했었다고,
그리고 이 말을 끝으로 그녀와는 다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오랜 나의 마음을 한번 오랜 이삿짐을 덜어내고자 한다.
그래 언제 한번 그녀가 했던 말처럼
이사를 도와준 대가로 내 이사도 돕겠다고 했었는데
내 마음속 짐들을 그 자리에
그녀와 만난 그 자리에 함께 덜고 오려한다.
정말 오랜 기간 그녀를 향했던 그 마음을 그 자리를 통해 덜어내고 싶은
아주 이기적일 수 있는 마음일 뿐이다.
그 아이에게 다시 연락을 해볼 생각이다.
어떻게 지냈는지
나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조만간 잠시 시간 내서 만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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