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을 짓다.
그 아이
성인이 되고 난 후 좋아하는 감정을 알게 되어서인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마치 내 옷에 스며들듯 염색되어 그렇게
그 자리에
계속
당연하게 있었다.
이제는 그 옷을 벗어 고이 접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두고 오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 애에게 연락을 남겼다.
얼마 전 생일이었으니 오랜만에 연락을 해도 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 같았다.
항상 10월 17일이면 그 애의 생일인 것이 어떻게 해서도 기억이 났다.
이상하게 그 애가 생각이 날 때면 생일 언저리였고,
오늘이 어떤 날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나중에 떠올려 보면 그 애의 생일이었던
그런 식의 날들이 있었다.
어쩌면 매우 스토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흐르자 그녀가 반갑게 답을 보내왔다.
나의 안부를 물었고,
나 역시 근황을 전했다.
정말 갑작스러운 연락임에도 반가워하는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반가워하는 모습에 바로 이어서 나의 본론을 꺼내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사실 부탁할 게 있는데,
언제 시간 내줄 수 있니?"
나의 말이 너무 수상했었는지 답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종교권유? 차용? 혹시.. 다단계?
정말 그 애로서는 오랜만에 연락 와서 한다는 것이 부탁이라고 하니
수상쩍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음... 혹시 부탁이 뭔지 먼저 말해줄 수 있어?"
"아니.. 만나서 얘기해야 하는 건데 지금 말해줄 수는 없어.. 미안해"
"혹시.. 종교 관련된 거니?"
"아니...! 종교나 돈 빌리는 거나 이상한 거 아니고...
사실 내 고민 때문에 그런 거야..
너랑 많이 관련이 되어있고."
그렇게 더 수상한 문답이 지나고 더 오랜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너무 수상하다 못해 확신이 들었는지 나와 친했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00이랑 최근에 연락한 적 있어?"
"아니? 왜?"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연락 와서ㅎㅎ"
그렇게 그 애는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다시 연락을 이어갔다.
"혹시 그럼 전화로 얘기할 수 있어?"
본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니 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설마 학교폭력? 미투? 와 같은 더 이상한 방향으로 걱정하기 시작할 때,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안녕.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럼 나는 잘 지냈지"
"근데 진짜 무슨 일이야? 너 뭔 일 있어??"
그 아이가 정말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을 느꼈지만,
금세 입안에서 씁쓸한 맛이 올라왔다.
"원래는 만나서 할 얘기였는데,
내가 생각해도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한다는 게 부탁한다는 말이
많이 수상해 보이기도 하고 경우도 없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계획이랑은 좀 다르긴 하지만 전화로 말할게
우선 이렇게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미안해.
사실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너를 좋아했었어.
아마 그건 네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대학교 때는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지금까지도 마음 한편에 그 감정을 깊은 곳에 숨겨놓았어
근데 이제는 00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리고 그동안의 마음을 이 시간 후로 정리하고 싶어.
어쩌면 굉장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네게 부탁한 건데,
이렇게 부탁을 들어줘서 너무 고마워."
나의 긴긴 대학생활의 모노로그가 방금 마지막 대사를 끝마쳤다.
관객은 오직 하나였고
관객은 곧바로 반응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저 수화기 너머로 작은 침음만 들릴 뿐이었다.
"아.. 그랬구나.. 나는 몰랐어 00아..."
"근데 언제부터였어?"
"아마 대학교 2학년 때부터였을 거야
혹시 너는 내가 이런 마음이었는지 알고 있었어?"
"그렇구나..
아니. 나는 전혀 몰랐어..
근데 우리가 어떤 접점이 있었나?"
그 아이의 말이 무대 위에 오른 나를 단숨에 현실로 끌어내렸다.
"음... 우리가..."
이삿짐을 옮겼던 날, 같이 시내에 나갔던 날,
통화했던 날, 연락을 했었던 날...
어쩌면 굉장히 작고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그날의 나와 그 아이를 들려줬다.
그리고 조금씩 대화를 하다 보니 기억이 나기 시작해서
같이 보냈었던 대학시절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러다 문득 그 아이가 말했다.
"00아 근데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해 줘서 너무 반가웠고,
네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도 그걸 지금 말해준 것도 고마워,
정말 용기가 대단하다.
나는 절대 못했을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나는
고마움
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가 용기를 냈던 것도,
네게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감정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는 게 더 가혹하잖아..?
그리고 지금처럼 네게 이 감정을 전했을 때
'지금 이 감정을 전해서 뭐 어쩌라는 건데?'식으로
내게 무안을 주지도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고 고마워하는 네 모습을 보니
나도 즐겁고 정말 고마워.
그리고 이런 너를 좋아했었다는 게 너무 다행이야."
정말 오랜만에 사람으로서의 감정에 충실한 채 대화를 해나갔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감정이 가장 어려운 것이 이 상황에 처한 당사자가 아니라면
깊이 공감하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몇 번의 서로 알지 못했던 점들을 알아가다 보니
시간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다음날을
그리고 그녀도 그녀의 다음날을
위해 잠에 들기로 하고
언젠가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끝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나의 오랜 오랜 모놀로그는 막을 내렸다.
수많은 관객들이 있었지만 결국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독백은 관객 하나만을 향했고
나의 마지막 독백은 제4의 벽을 허물고 그녀와 함께 완성되었다.
실제로 나는 현재 매우 개운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애물단지가 있던 자리가 비워지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나는 또 다시 막을 올릴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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